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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1독립만세 소리 터지고 운동의 여세와 이미 해외에 망명 중인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울 제 유림단 대표도 고유돼 정식 참여했다. 5월 파리서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매 상해 임정에선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어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하는데 기회삼아 유림단 따로 독립청원서를 만들어 그 분을 통해 파리회의에 내기로 결의했다. 김창숙 유진태 이중축 김정호 성태영 유예근 등 그 운동 참여인사들은 청원서를 김창숙을 대표로 상해 임정에 전달키로 하여 그 전야의 장송 자축자리에서 공이 선창한 정기가는 좌중을 숙연 비장케 했던 바 공은 함경남북도책이였고 모두 명성 높은 173 인사로써 매듭지었다. 그 서명 날인장과 함께 세칭 파리장서를 만들어 아울러 김창숙 편 임정으로 보내다. 그 글은 면우 곽종석이 지었다. 이 거사 뒤에도 공은 국내외의 활약 중 만주 무순에서 왜경에 체포돼 5개월 넘게 옥고 이후 북경에서 김창숙 신채호 등과의 재회로 운동사를 협의했음이 김창숙 저인 벽옹일기와 파리장서 약사에 실려있다. 천석유재를 촉망받는 아이들의 장학금과 난처한 동지들의 가계를 돕기에 끝내 쾌척했고 부유 친지들께 불선자금을 모아 운동에 공헌하였다. 10년 앞서 공의 묘비에 중제 김황은 찬하여 「이것은 오직 저 시백의 무덤이언만 그 충성된 기백과 의로운 넋은 흙으로 화하지 않고 5척 해바라기가 돼 해를 향해 피어있도다!」고 찬탄했으며 1990년 나라에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슬픈지고! 미처 광복을 앞서 즈려가심이여! 애족 자비및 부석신명턴 위국정기는 은은할 손 해인의 범종소리로 겨례 혼의 산맥 깊이 영생하리라. 단기 4327년 갑술 8월 일 수 광복회 경남지부장 벽창수 근찬, 불초자 두식 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