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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군 뒤쪽에 정성스럽게 쌓여진 강홍열 선생의 비석이 있었다. 강홍렬 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합천의 전군에 전달 배포하는 등 3·1독립운동의 조직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3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에 보천교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으며 그후 의열단장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4년 2월 상해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의 군자금 조달에 관한 협의를 한 후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관서 등 일제의 주요 관서 폭파 및 고관 암살 등을 기도하던 중 일경에 의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7호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합천에서 삼일의숙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광복이 될 때까지 임정의 경남내무부장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