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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친교로 세교가 끊이지 않았으며 최면암선생의 대마도로부터의 선장날에 국내 유명인사들이 모여 슬퍼할 때 공은 친당 서강선생을 대신하여 제문을 지어 읽어 면암선생의 애국정신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기미 1919년 3월 고종황제의 인산때는 독우인 복재 문홍선과 함께 참여하고 돌아올때 독립선언문 수백매를 가져와서 여러곳에 나눠주었다. 3월 18일 독우 권영두 권중○ 임상종 송헌기 정시권 권량희 등 20여현과 금곡 곽씨산정에서 밀회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할 것을 숙의 3월 20일 창리 장날을 기함을 맹약하고 독립선언서와 대소 태극기를 제작하여 군내를 밀행하며 동지들을 규합하니 거사 당일은 4천여의 군중의 운집이더라. 주동자들은 분담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고 군중 앞에서 인수공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니 군중의 함성으로 산천이 진동했다. 격분한 군중은 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식호적부와 관형서류 등을 소각하고 왜경 1명을 난타 유혈이 낭자케하여 반죽음으로 몰았다. 이를 알고 달려온 왜군들은 총을 난사하며 칼을 휘둘러 난폭하니 아비규환 바로 그것이라. 기시 상황은 불언가상토다. 왜군은 면내를 돌아다니며 노소를 불문하고 검거하니 합천서에 투옥된 사람은 100여명이더라. 이에 공은 내가 선동하였다 그 분들은 무죄라고 주장했던 바 45일만에 모두 풀려나고 남은 사람은 2명으로 옥중 구타가 심하다는 소식을 들은 친당께서는 분격하여 말을 달려 급사 주임실에 불문곡직 들아가서 너 이 놈 너도 너 이 나라를 위한 것이고 인수 역시 우리나라를 위한 것일진데 무슨 죄냐고 고함하며 담뱃대로 주임의 두상을 연거퍼치니 유혈하는 상처를 감싸쥐고 통변인에 물어매 여차하다 하니 눈을 부라리며 병원으로 달려가고 선생은 투옥되였다. 이어코 식사가 제공됨에 이곳에서 죽어나갈 지언정 왜놈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든 차제에 사법서사 이문기공이 달려와 미음을 권하며 위로하니 고마워했다. 선생은 투옥 3일동안 일언고질없이 환가했다. 공과 권영두공은 합천서에서 수개월간 곤욕을 치르다가 진주지청으로 이송되어 각각 2년형을 받음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왜헌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병면 의거는 함안 군북 의거와 함께 가장 격렬했다고 하니 이 고장의 항일정신을 짐작케한다. 공께서 대구감옥에서 1922년 10월 7일 2년형을 마치고 환가시 군내 환영인파는 인산인해로 공을 위로수행하니 경찰에서 대경하여 무장왜군 10여명을 급거출동시켜 감시했으나 아무 동요없이 대병에 돌아왔다. 동시에 인산군중을 해산시키고 왜군도 돌아갔다. 공이 친당선생을 배갈하니 늠름한 모습으로 수고했다. 대한남아로서의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격찬하셨다. 그후 계말 1943년 정월 27일에 친당께서 진세하시니 공은 주야로 통곡했고 3월 후에 봉산면 내화리 선영 좌록술원에 예장하고 3년상을 하루 같이 모셨다. 친당선생의 문집 10여권을 형행할 제 농우를 팔아 그 비용에 충당하니 공의 지효함을 헤아일만 하도다. 공께서는 정해 1947년 11월 15일 향 62수로 타개하시니 창리 서백등신좌원에 모시니 공을 경모하여 회곡한 인사가 수백을 헤아렸더라. 공의 유문이 있었으나 소실되었으니 통석이라. 배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