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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되기도 하였다. 공은 1916년 묘산면 화양리에서 파평윤씨 묵와공 현손인 희수의 아들로 태어나 묘산 공립보통학교 제1회를 졸업하고 향학열에 불타던 중 외가의 도움으로 도일하여 동아철도고등전문학교를 거쳐 조도전대학교 법정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일본패망 발언을 하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지인의 도움으로 철도차장견습생으로 근무하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주위의 여러 사람에게 세계정세를 설명하며 일본은 곧 패망한다는 발언을 계속하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소집영장이 나오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징집영장이 나오지 않는다며 응소하지 말것을 역설하여 일본국민 계층간에 차별심과 불화를 조장하여 국가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하고 일본국민들의 전쟁 필승의지를 저하시키는 발언을 거듭하다가 일본경시청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기도 하였다. 일본강점으로부터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625동란이 일어나 3년간의 동족상쟁으로 수백만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온 국토는 폐허가 되고 많은 국민은 헐벗고 굶주리며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혼란기에 나라를 부흥시키는 길은 오직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능기출신 장중균 정균 형제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창촌마을 구 면사무소 부지에 고려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으로서 학교를 발전시키려고 진력하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2년여만에 폐교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중에서도 재학생들을 인근학교로 편입시켜 젊은 후진들에게 꿈과 희망을 품게 하여 한 고을의 지적수준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공은 성품이 순박하고 인자하였으며 나라사랑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베어있었고 곤궁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타계하신지 27년이 지난 오늘 뜻있는 면민과 문도들이 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