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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인데 현모양처로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공은 서기 1921년 이곳 관기리 본제에서 출생하니 어릴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어른들의 촉망을 받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피끓는 동지 학생들과 문예부 다혁당 등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기관지 반딧불과 학생 등을 발간하여 가물거리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한편 대중 속에 침투하여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고취하다가 1941년 7월에 35명의 동지와 함께 왜경에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꿋꿋이 버티다가 마침내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았고 옥중에서도 비밀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공과 동지들이 예견했던대로 일본이 패망하여 옥중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니 그 기쁨 어디다 비기랴. 옥문이 열려 고향으로 돌아와 4년 옥고에도 아랑곳없이 교육을 통한 조국 재건에 나섰다. 모교인 묘산국민학교와 합천국교를 거쳐 대구사범부속학교에서 애국애족의 참교육에 헌신하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 국제연합군 통역문관으로 뽑혀 종군하였는데 그해 12월 15일 38선 이북의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항일투쟁에 젊음을 바친 투사로 하여금 하늘은 어이 광복된 조국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목숨을 잃게 하였던가. 부인 조능수 여사는 본관이 창녕인데 청상의 몸으로 어린 아들 맹권 창권을 고이 길러 품팔이도 마다 않고 학비를 마련해 대학까지 진학시키다가 미처 성취도 못 보고 1971년 5월 15일 한 많은 일생을 마치니 묘소는 저 화성산 기슭 유좌이다. 이제 맹권은 회사 간부로 창권은 중견 교육자로 사회 국가에 기여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유덕의 소치이라. 오호라 공이 가신지 근 반세기 년전에 정부에서 공의 충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번에 고향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