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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고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고 다녀온 정태섭등이 독립선언문을 가져와 합천전역에 전달하니 이에 의를 참지못하여 민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도다. 정대섭 권중찬 정시권 권양희 송헌기 유인수 등과 밀회하여 대병면의 독립만세의거를 3월 20일 오후 1시에 창리 장날에 거사할것을 결의하고 독립선언문을 대병면 성리 고사정에서 비밀히 등사인쇄하고 큰 태극기와 작은 태극지 수백매를 만들어 각 동리 집집에 그날 시장에 빠짐없이 나오도록 통지하고 각자 지역분담을 하여 활동을 전개하니 3월 20일 오후 1시에 창리에 4000여명의 장꾼이 집결하자 권영두는 앞장서서 군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일제히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니 창리가 떠나갈듯하다. 시위행진에 들어간 군중들은 창리시장을 두어바퀴돌고 주재소를 포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돌격하여 들어가니 순사부장이 총을 쏘아 선두에 섰던 이병구의 머리를 스쳐 유혈이 낭자하자 권영두는 군중을 휘동하여 주재소를 파기하고 면사무소로 몰려와 면의 문서를 불질렀다. 이렇게 군중들의 항일의분이 터저 오를때 합천경찰서는 수비대 수십명이 달려와 공포를 쏘고 다시 총검으로 군중을 해산시키는 한편 앞장선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하다. 그날 검거되어간 군중이 50명이나 되고 권영두는 현장군중속으로 몸을 피해 검거되지 않았으나 얼마후 왜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0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그 후 구국단심은 더욱 타올라 원근동지들과 뜻을 모아 재항쟁을 계속하니 크고 작은 신고는 헤아릴수 없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여생을 향리 후진양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