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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채와 기상이 탁월하여 사우에 추중을 받았고 수학 중에도 후에 법관 노흥현 면장 김한호 등 친우들과 사냥을 즐겼으며 건장한 체격으로 비호같고 총 쏘는 솜씨가 비범하여 포호장군 별명도 붙었다. 공이 28세 때 일제 침략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왜놈들의 파렴치한 행동으로 국민정신을 말살하고 국권마저 상실되니 황제의 미력함과 국운이 쇠퇴함을 개탄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구례 고광순 의병장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구례 곡성 하동 산청 합천 진주 등 일대에서 왜병과 수십차 교전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후 화개 탑동 전투에서 고광순 의병장이 두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장군이 전사하자 적개심에 권대장은 의병을 규합하여 하동에 주둔한 왜병 수비대를 습격하니 사망 40여명 부상자 부지기수였다. 패보를 접한 진주왜경은 지원군을 보내니 중과부적으로 권대장은 섬진강으로 적을 유인하여 신출귀모한 도강전술로 섬멸하는 등 도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하동 병양면 부근에서 동지 30여명과 자금 조달차 진주로 가는 도중 왜병의 추격을 받아 대병 봉화산으로 도주 중 총상을 입고 쌍암 질 영화 집에 피신하던 중 왜경들이 질의 가옥을 방화하자 야간도주하여 풍찬노숙하면서 각고면려 끝에 회복하였다. 그 후 1908년 투옥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진주감옥을 폭파하고자 화약을 입수하여 진주로 잠입 중 동지로부터 정보가 누설되어 피체되었다. 권대장은 살벌한 법정에서 당당한 자세로 나라를 도적질한 왜놈의 재판은 받을 수 없다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중형을 받아 복역 중 심야에 졸고 있는 간수 2명을 살해하고 구척 담을 월장하여 탈옥했다. 탈옥한 지 얼마 후 다시 붓장수로 변장하여 은밀히 활동하던 중 육지를 감출 수가 없어 다시 피체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진주경찰서에서는 수차 수감 탈옥한 자라 감시가 심하였고 손을 뒤로 돌려 묶고 팔관의 쇠뭉치를 채워 운신을 불능케 하였으며 상고를 하였으나 감형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 국사범에 대한 특구령 의거 6년 9개월 만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출되었으나 가정은 파산되었고 출옥을 고대하던 부친과 부인 노씨마져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9세였으며 함양군 유림의 천거로 백전면 매취재에 열녀비가 세워졌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남에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