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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다음어 공의 유적비 세울것을 상약하여 의사의 유적비에 쓰일 현각문이 없는 고로 종인 경연 명수 군이 나에게 이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공과 나는 병기아 같으며 어찌 감히 마다하리요. 생각해보면 그 후에 동란을 겪으면서 문권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이도 그 사종이 안의읍지와 경남 3.1운동사 거창군지 이승만 대통령표창장 선균관장 박중훈 표창장 노태우 대통령 훈장 거창유씨 세보등에 역역하고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공은 본대 세상에 크게 쓰일 대재량이었으나 조금도 갚음이 없었고 배일 기개가 남보다 다르더니 을사보호조약에 이르매 비분강개해서 구국지책에 매양 선봉에 섰고 태황의 비보를 듣고는 북망호곡을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인산 후 독립선언서 낭독후에 온 겨례가 일제히 분기한즉 고은 안의지방의 민중선봉이 되어 군중의 용기를 북돋으니 그 함성은 땅을 뒤흔들고 의기는 충천해서 저들과 다행하며 왜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저들의 총검과 싸워 연이은 살상에도 격려하고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더라. 체포구금후에도 통렬히 저들을 꾸짖기를 마지아니하고 이번 기미사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계시킴은 불가하다고 호통하니 이로 인해 전주감옥에서 3년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겪어 몸에 온전한 살갖이 없었으나 시종 흔들리지 아니하니 모두 장하다고 하더라. 그 후 왜경의 혹심한 감시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솔권해서 세상을 숨었고 공은 풀려났으나 두문사세하고 오직 시서로 업을 삼았다. 공복후 병신 9월 초3일메 돌아가시니 금곡촌 뒷산 경좌에 장하사다. 배는 경주 이경일이오 계미년에 출생하여 계축에 돌아가셨다. 의사의 무후가 불가한 고로 종론으로 재종질 병호를 후사로 이음은 의사의 높은 절의를 오래토록 전하고저 하는 심법이라. 명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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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 돌을 다듬어 공의 유적비 세울 것을 상약하여 의사의 유적비에 쓰일 현각문이 없는 고로 종인 경연 명수 군이 나에게 이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공과 나는 병이가 같으며 어찌 감히 마다하리요. 생각해보면 그 후에 동란을 겪으면서 문권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도 그 사증이 안의읍지와 경남 3․1운동사 거창군지 이승만 대통령 표창장 성균관장 박중훈 표창장 노태우 대통령 훈장 거창유씨 세보 등에 역역하고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은 본대 세상에 크게 쓰일 대재량이었으나 조금도 갚음이 없었고 배일기개가 남보다 다르더니 을사보호조약에 이르매 비문강개해서 구국지책에 매양선봉에 섰고 태황의 비보를 듣고는 북망 호곡을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인산 후 독립선언서낭독후에 온 겨레가 일제히 분기한즉 공은 안의지방의 민중선봉이 되어 군중의 용기를 북돋우니 그 함성은 땅을 뒤흔들고 의기는 충천해서 저들과 다행하며 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저들의 총검과 싸워 연이은 살상에도 격려하고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더라. 체포구금 후에도 통열히 저들을 꾸짖기를 마지아니하고 이번 기미사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계시킴은 불가하다고 호통하니 이로 인해 진주감옥에서 삼년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겪어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었으나 시종 흔들리지 아니하니 모두 장하다고 하더라. 그 후 왜경의 혹심한 감시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솔권해서 세상을 숨었고 공은 풀려났으나 두문사세하고 오직 시서로 업을 삼았다. 광복 후 병신 구월초삼일에 돌아가시니 금곡촌 뒷산 경좌에 장사하다. 배는 경주 이경일이오 계미년에 출생하여 계축년에 돌아가셨다. 의사에 무후가 불가한 고로 종론으로 재종질 병호를 후사로 이음은 의사의 높은 절의를 오래토록 전하고저 하는 심법이리라. 명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