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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산 45-2 살목마을 숙관 윤충하 선생의 묘를 찾아왔다. 저 밤나무 뒤쪽에 있다고 한다. 1905년 11월,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광무황제에게 한국의 외교권 박탈 등이 포함된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으나 광무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지용·이근택·박제순·이완용·권중현 등을 사주하여 황제의 날인 없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나인영·오기호 등은 조국을 일본에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이른바 을사오적을 처단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기로 결심하고 당원을 모집하였다. 이 때 을사오적 처단조에 가입한 그는 나인영 등의 오적 처단계획에 따라 1907년 음력 2월 초순 두 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처단을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2월 12일 을사오적들이 공무로 출근하는 길목을 동지들과 나누어 매복하다가 같은 시간에 각지에서 오적을 저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동 노상에서 권중현을 저격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였고, 다른 곳에서도 실패하여 피체되고 말았다. 피체 후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의 모진 악형과 심문을 받고도 불굴의 의지와 기개를 보였던 그는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소위 형법대전 율에 의해 유형 10년을 받았다. 출옥 후 1919년 2월 거창에 있는 곽종석을 방문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내용과 전망, 서울 유림들의 독립문제에 대한 동태를 세밀히 보고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이 운동에 곽정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권유하였다. 그 후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곽윤·김황 등과 함께 상경하여 김창숙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921년 9월 태극단의 대표로 태평양회의에 일본의 한국 강점을 부인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정부로 승인해 줄 것과 파견된 한국위원의 출석권을 요청하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