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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월성의거사적비 안내판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월성리에서 남강 오일선 선생을 중심으로 의사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도총,유격,후군,군수, 정보등의 부서를 편성, '월성의병'이라 했다. 군사본부를 김현일의 사랑채에 두고 작전 지휘를 했다. 1906년, 문태서 의진과 제휴, 고창골에서 싸웠고 덕유산 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로 했다. 1907, 거창읍 주둔 적을 습격, 임구희가 전사했다. 1908년, 무주구천동 전투에서 전과를 거두었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1909년, 전북 계북전투에서는 유춘일이 전사하고 박화기 아장과 동생 박수기는 일제의 정탐군 '최고미'의 밀고로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순국했다. 그의 밀고는 계속 되어 하일청이 적에 피살되었다. 1912년 4월 26일 박민기의사는 월성리에 나타난 '최고미'를 처단하고, 피체되어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서울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일합방 후 의병이 더러 적에 잡혀, 김응삼은 10년을 서울감옥에서,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5년을, 임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의 형을 치렀다. 그 의로운 정기는 영원히 빛날 것이요. 후생들의 마음속에 조국수회와 번영의 길을 밝혀 주는 횃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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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의거사적비 아. 월성-의병. 거창의 월성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경상남도 안의군 북상면 양지리(1165번지)에서 태어나 학문과 경전에 능통하여, 큰 스님으로 호를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한 대호 문언조를 중심으로, 의사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등, 이 지역민 50여명은 월성서당(1165번지)에 모여 국가정세를 토론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해야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여 의병을 발족 의병봉기를 결의하게 되었다. 도총, 유격, 후군, 군수, 정보, 감찰, 경리 등의 부서를 편성하여 부대의 이름을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문언조 선생은 군사본부를 김현일(현영)의 사랑채(1294번지)에 설치하여 작전 지휘를 하였다. 황점. 경원탁, 내게 이규현, 양지. 오필선, 심동 안진태(교태), 산수. 고제두, 병곡 신병삼, 창선. 장명국, 갈계. 임필희 등을 각 연고지에 파견하여 병력, 군수, 감찰 정보에 관란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었고 이들은 군자금을 스스로 헌납하며, 동민도의병을 돕고자 음식, 자금, 인명 등을 적게는 십여명씩 많게는 사오십명씨 마을 단위로 출헌하였다. 유걱장군 하거명, 아장군 박화기는 정예병사 유춘일(일명 유육손), 김권원, 박수가, 임구희, 하일청, 김응삼(해운), 박찬일, 김일종, 강옥현, 박문규,박정규, 조순집, 이순갑 등을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열락을 취하며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그 암호는 베 짜는 북을 가는 소리로 하였다. 또 깅옆에 표식을 비차하거나 철거하는 방법으로 행동을 신속 민활하에 하여 적의 허점을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후군장군 김성진은 박민가,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송군필 등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수장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김군배, 조성목(덕일), 강옥성 등에게 군량과 무기 탄약 등을 수집, 제조, 조달하게 하였으며, 장명국, 임필희는 자금을 조성관리하고, 강임형(임석)은 의병인을 모집, 감찰 이석길(권호)은 보부 소재 마을 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정수경, 이순진으로 하여금 정보를 수집, 조달케하였다. 월성의병은 1906년 문태서가 인솔한 삼남(호서)의병과 제휴하여 싸우리도 하고, 각처에 모여든 덕유산 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나기수(기균),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하에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었다. 1906년 9월에는 삼남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적 10여명을 몰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의 적을 죽이는 개가를 올렸다. 1907년에는 거창읍 씨악실에 주둔한 적을 습격도중 임구희가 전사하여 북상면 강선대 모리절로 피신중 일경이 모리절까지 따라와 작전을 전개할 무렵 선제공격으로 30여명 전원 사살하였다. 1908년 유명한 무주구천동 삿갖골 두 전투에서 삼남의병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적 이백여명을 포휘 섬멸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는 등 의병들의 피해도 많았으며 동년 구월 삿갓전투에서 적 7명을 죽였으나 적의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이 전부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폭도 혐의로 1908년 10월 4일 장수계북양악에서 모진 고문과 자인하게 사살되었다. 최고미의 밀고는 계속되어 1909년 12월 7일 하일청도 적에 체포되어 살해되었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그 직후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놓고 아이, 안여자, 어른을 가리지 않고 가혹한 고문(인두)으로 심문하였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의사 박만기는 저에게 자신이 한 단독 소행이다 라고 허위자백을 하였다. 잔여 의병과 동민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마을의 안정을 찾았으나 그는 피체되어 1912년 9월 28일(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통한의 한일합방이 강제로 이루어진 후 문언조선생과 의사들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의병이 적에 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김응삼(심해운)은 종신형을 선고받아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5년을, 박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의 형을 치렀다.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조성목은 극심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서 석방되었으며 후군장군 김성진은 무주수비대에 체포되어 압송도중 탈출하였고 조순집, 이순갑은 일생을 각지로 뜨돌았으며 경원탁도 피신도중 위천상천 진등마을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실신되어 풀려났다. [서기 1970년 월성의거사적ㅂ는 건립당시 인명과 순위를 왜곡 건립하였기에] [서기 2018년 4월 22일 경상남도 진주서부 .....이 수정, 보완하여 유족의 선금으로 2020년 1월 30일 재건립, 마음을 담아 후손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시는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하여 저 일월과 함꼐 완연한 횃불로 항구희 되살아 타오를 것이다. 월성의병사적비는 연로하 생존자의 목격담, 문달천, 이옥원님 말씀에 나랏님이 서당을 야밤에 의관복차림으로 두번 방문 앞, 뒤에 날옆한 장정이 동행하였다. 김상용의 말씀에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은 시신훼손이 심한관계로 장정 5명이 바지계에 나누어 담아지고 마을에 도착하여 덕석을 펴고, 키가 큰 사람, 적은 사람, 마른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향리의 전언 및 전적지 답사, 유족등의 비망 또는 족보등의 근러고 하였으나 그 후 판결문을 찾아 수집, 보완하였다. 지금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1867번지)에는 월성의병사적비가 서있다.(산하의 주민중의 애국인사들도 협력하였다는데 이름을 전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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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이 아닌 책의 내용을 표시한 느낌이다. 중간 중간 지운것을 왜일까?. 이것은 현충시설에 등록된것인데 임으로 변경해서 현재도 문제가 있는 상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