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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관향은 경주최씨로 호는 석주요 자는 찬옥이시며 휘는 병찬으로 1882년 4월 10일 염순공과 남평문씨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일찍이 송계 전규진 공과 우당 조재학 공에게 수학하셨고 연재 송병준 선생에게 사사를 하셨다. 1907년 보성전문경제과를 졸업하신 뒤 대한제국 도지부판임관에 서임되셨고 이어서 모교에서 2년간 교수를 역임하셨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노골화되자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시고 대동청년단에 입단하시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모든 관직을 버리신채 최광으로 변명하시고 도산 안창호 백산 안희제 선생을 비롯하여 이극로 이갑 신채호 김동삼 서초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시베리아로 망명하시어 신한민보 독립순보 발행의 책임을을 맡기도 했으며 세계 열강국 원수들에게 일제 강점을 규탄하고 조국독립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하는 청원문(성명회 선언문)을 전달하는 등 크게 활약을 하셨으니 1919년 신병 악화로 환국하시어 동래 범어사에서 안준상 공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자 고향집으로 오셔서 정양하시던 중 1918년 11월 25일 한많은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37세이셨다. 이에 송계공의 시문에 이르되 「3군의 병력은 빼앗을 수 있어도 그대의 뜻은 가히 뺏지 못할 것이고 여섯마리 말은 따라갈 수 있지만 그대의 진보는 따라갈 수 없도다」라고 했다. 더구나 선생의 외아들이신 공렬씨도 진주고보 재학 중 일본학생들과의 대립 끝에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부자분이 모두 항일투사로서 거룩한 삶을 마감하신지라 제씨 병기공의 아드님이신 윤두공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으셨다. 선생은 민족사의 암흑기를 맞이하여 일생의 부귀안락을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