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page


348page

최병찬(최광)은 경남 의령(宜寧) 사람이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전문과(經濟學專門科)를 졸업한 뒤 탁지부(度支部)에 들어가 국망(國亡) 직전인 1910년 3월까지 주사(主事)로 근무하였다. 1908년 3월에는 영남지방의 교육진흥과 인재양성을 목표로 서울에서 박정동(朴晶東)·이하영(李夏榮) 등이 발기하여 조직된 교남학회(嶠南學會)에 참여,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 2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해 동년 8월 일제의 한국 병탄(倂呑)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이의 무효를 선언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宣言書)가 발표될 때 서명하여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다. 1911년에는 이갑(李甲)을 보좌하여 미주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국민회의 원동(遠東) 경영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페테스부르크 지역의 경영 실무를 서초(徐超)와 함께 담임하는 한편, 미중서 발행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원동(遠東)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3월 26일 개최된 국민회 시베리아지아총회 제1회 대의회(代議會)에서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강(李剛)·김탁(金鐸)과 함께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선정되어 총회의 자치규정(自治規程)을 기초하여 총회의 승인을 받아 통과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