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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죄명으로 금부에 구금되어 옥고를 겪었으나 시종일관 언행의 유려됨이 없었으며 왜적에게 황후가 무참하게 시해되고 임금과 태자가 로관에 파천하는 대변란이 일어나자 3년만에 석방되었다. 귀가 후 유곡 송산 벽촌에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에 전념 우국의 울분자위했다. 로일전쟁 후 일본의 강요에 따라 을사한일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을 길 없어 수평공을 배종 상경하여 내집한 13도 유생들과 의합하고 수소자가 되어 조약의 부당성을 공박하고 대역 대신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문을 연속 세번이나 올렸으나 언로가 차단된 지 이미 오래되어 비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황매천 유록과 송연재집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어 당시 선생 형제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고 통탄비분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경술년 500년 왕조의 사직이 왜적에게 강탈되고 민족의 유구한 역사문화가 유린되자 조국이 광복되지 않으면 사후고혼도 불귀하겠다고 사당에 엎드려 읍체고유하고는 솔가하여 고국산하를 애련하게 뒤돌아보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망명하였다. 봉천성 임강현에 잠시 머물었다가 망명지사들의 항일기지가 되었던 유하현으로 이주 정착한 다음 그 곳 정세를 수파공에게 연락하여 익년인 신해년 11월 수평공도 단신으로 도만 망명 회인현에서 형제가 눈물로 상봉하였다. 병진년 수파공이 심초성병신음타가 접리현에서 별세하니 비통함과 고독한 심회 견될 수가 없었고 1977년 정사에 독립단장인 박장호 지사를 찾아 봉천으로 이주 동지를 규합하고 시사를 논의하면서 항일운동을 지속하였으며 고자 일상공을 빈번히 북경에 밀파 그곳 애국지사들과 정세 연락을 하였다. 1927년 정묘 일본관헌의 추적을 피해 청원현 대고가자로 이주하였고 자인 일상공은 광복단에서 설립한 의영학교와 개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애국동지 규합에 힘썼고 선생은 중국 유교 대표자인 하령봉 공으로부터 동삼성 유학회 분회장으로 천임받고 남북만주 방방곡곡의 애국지사를 방문하여 항일운동의 조대를 형성하는데 힘썼다. 1931년 만보산 사건과 중일군의 충돌에서 패북한 장학랑군의 패잔병들이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한족에게로 돌려 한국인 부락을 습격 살육을 자행하였으니 선생과 부인 이씨 아들 일상공이 난병의 총사에 운명하였다. 음력 8월 3일 오후이며 국파민강한 망명애국지사의 애절한 생애를 이국 산하마저도 울었으리라. 시신은 광복지사들이 애도하여 권폄되었다가 1936년 병자 3월 고손 경세님이 3위 유해를 반장 수많은 사림들의 추도 속에 향리의 선산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