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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위해 진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봉기함에 동시위에 가담하고 의령지방의 거사를 모하려 귀향한 27세 동갑 구여순의 제의에 적극 찬동하며 최정학 남호섭 등 제 동지와 대하야 의령읍내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세력으로 활약하였다. 3월 14일 읍내 장날을 택하야 궐기한 시위는 비밀리에 사전 준비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참집 군중에게 배포하며 시위 동참을 권하는 취지연설로 시작된 바 지사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들어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추변으로 역설하고 집회행렬의 선도에 임하였다. 시위운동은 수천읍민의 만세 고창과 도보행진으로 15일과 16일까지 연하였다. 연이나 만세시위 직후 일본관헌에 검거되어 3개월여의 구금 끝에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오래동안 일본경찰의 일상감시하에 생활하다가 일본국 대판(오사카)으로 이주한 바 그것은 일본 국내지에서 오히려 감시제한이 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1934년 이래 대판(오사카) 거류 조선인 연맹구 지회장을 맡아 교민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1938년에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의령으로 강제귀환 당하였다. 기후 태평양전쟁 발발에 이은 전시 체제하에서 인고의 날을 보내다가 조국광복 8개월을 앞둔 1944년 12월 20일에 5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니 의령읍 중동 산5번지 내곡 황토등에서 영면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2년 3월 1일 조국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일성은 경주 최씨 점이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수(대원)는 향리의 선각명사였으며 2남3녀 상석 상무 경자 영희 영옥이 있고 차남 정수는 해군 준장으로 보국한 국가유공자로 3녀 주흥 귀흥 경이었다. 장녀 광숙은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