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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다. 아들 기하의 나이 십칠세에 자부 경주김씨를 맞이했다. 자부와 더불어 수고로움을 같이하고 유인 자신의 몸은 험한 옷을 입고 부지런히 길쌈하고 베짜며 항상 베틀이 방 밖에 나갈 여유가 없었다. 또한 김매고 나물캐며 천신만고를 경험하였고 자부 김씨도 또한 시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며 스스로 괴롭다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정 살림살이가 이를 힘 입어 차차 풍족해졌다. 일가친척간에 화목하고 동서지간에 항상 신의를 지키니 집안이 화목하여 봄날같아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정축년 정월 이십일에 향년 팔십이세로 세상을 마치니 묘는 화정면 석천리 암수곡 자좌 지 원이요. 일남을 두니 기하 이시다. 기하가 삼남 일녀를 두니 장남은 희권이요 차남은 회상인데 출계하여 양자로 가고 삼남은 희갑이요 녀는 김녕 김봉근에게 시집보내고 희권은 일남 일녀를 두니 남은 길남이요 녀는 진양 강성윤에게 시집보내고 희상은 이남 일녀를 두니 남은 수용 만용이요 녀는 김녕 김성근에게 시집보내고 희갑은 삼남을 두니 광남 광명 광복이요 길남의 아드님은 종갑이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슬프다. 유인이 절개를 지키며 위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 가솔을 잘 다스리니 부인의 도리를 잘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남편따라 순절한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어찌 가히 위대하다 아니하리요. 도계의 법전을 살펴 보건대 이같은 행적이 어디 흔한 일인가. 일찍이 세상에 널리 알리어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탄식해 아름답지 않으리요. 그 맞손자 희권이 집안에 전하는 가첩과 기록을 가져와서 나에게 말 하기를 조모님께서 세상을 뜨신지 이십삼년이 지났다. 그 깊고 아름다운 덕행이 잊혀지고 그 전해짐이 없어질까 두려운지라 원컨대 한 말씀 주셔서 기록함이 좋겠다고 하여서 그 말씀에 감탄하여 슬픈 눈물이 흐르는지라.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내가 글이 비록 모자라기는 하나 그 감격을 받아서 감히 글을 써서 이와같이 말 하노라. 서기 1959년 기해 2월 일 파산 조성언 선생 글 짓고 신안 주창돈 선생 해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