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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정국이 안으로는 세도정치와 민란으로 혼미에 빠져가고 밖으로는 열강의 극동진출로 국민은 바야흐로 불안에 휩싸일 무렵 선생은 서기 1861년 9월 4일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춘호 조익환 공의 3남으로 탄생하셨는데 자는 공습 호는 오당 일직부터 수학에 전념하였으나 일본이 점차 한국침략을 흉모를 들어내자 우국의 충정에서 약관의 몸으로 감연 책을 덮고 일어서 천하를 누비며 명사들을 찾아 동지를 맺고 1882년에 면암 최익현 공을 1888년에는 연재 송병선 공을 스승으로 받들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려 했다. 때마침 일본은 로일전쟁에서 승전하자 1904년 총검하에 한일조약을 1905년 다시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니 정부는 이에 굴하고 말았다. 전국민은 분격하여 정부각료와 일본에 항거했고, 선생도 면암을 따라 항의에 나섰지만 정세는 너무도 급박하여 오직 의병의 항쟁만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믿고 1906년 4월 인근 각지를 돌면서 모병에 나섰다. 면암의 의병이 순창에서 패하여 면암은 일본 대마도로 호송되자 선생은 대마도 엄원에 상륙하여 스승을 위문하고 순의의 부음이 전해지자 선생은 운구와 장례에 자제의 의를 다했다. 1910년 망국의 슬픔을 달랠 길 없었지만 조국광복의 염원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와 구금으로 옥고만 거듭할 뿐이어서 1914년 4월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자온 사건으로 8월 2일 울릉도로 만 1년 유형되고 1919년 2월 고종이 승하하자 상경하여 동지와 독립선언문의 발표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일시 잠적, 7월 파리장서를 선생과 면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등과 상의 작성한 사실이 발각 성주경찰이 선생가를 내습하였으나 그때도 일시 잠적했고, 그해에 고사연구회를 꾸렸고 1921년 2월 서울 팔판동에서 구속되었다가 출옥, 다시 고사연구회를 입도공의소로 개칭하여 동지 규합에 나섰으나 뜻과 같지 않아서 선생은 실의와 고민에 잠긴다. 1927년 진주와 의령의 접경의 그윽한 곳을 복하여 두어간 초옥을 짓고 봉소암이라고 이름하고서 은둔사색의 15년인 1943년 5월 14일 우국지사로 파란많던 생애를 마치니 향년이 83이시다. 슬프다 선생의 염원이던 조 국광복을 2년 앞둔 채 서거하시다니 하늘이 어찌도 이같이 무심한지고 여기 후배들이 모여 선생의 유덕과 공훈을 돌에 새겨 깊이 전하고자 하오니 선생이시여! 고이 잠드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