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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하였다. 그 후 보성전문과 양정의숙 등에서 신학문에 심취하던 중 성재 이시영에게서 감화를 받아 의사의 우국애정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의사는 조국을 되살리는데는 교육이 급선무라는 확신 아래 구포에 구명학교 선녕에 선신학교 입산에 창남학교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웠다. 25세때인 1909년에 망국이 목전에 다가오자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고 이듬해에 드디어 국치를 맞게됨에 도산 안창호 의암 손병희 등과 회동하여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27세에는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갑 신채호 등을 만났고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하였다. 그 후 의사는 뜻한 바 있어 30세에 귀국하여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던바 이 회사가 날로 번창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은 물론 상해임시정부의 비밀연락 창구역활을 맡았으며 특히 부산의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시민들은 백산상회는 시민의 회사요 백산 안의사는 부산의 주인공이다라는 칭송을 보냈다. 35세때에 3.1운동이 일어남에 족질 준상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 수만장을 배포토록 하는 한편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준재를 해외에 유학시켰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 창립에 관여했고 그 후 중외일보도 인수하여 필전으로 왜정에 대항했다. 43세 때에는 백산상회 대신 자력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선도하다가 47세 이후에는 만주 동경성 일대에 발해농장을 경영하여 교민의 생활을 안정시켰더니 세인들은 이곳을 단족리 상촌이라 불렀다. 또한 단군의 대도와 교화로 한민족을 단결시키고자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는데 경전을 간행한 일이 화근이 되어 투옥되었고 58세 때에는 이극로가 대종교에 보낸 널리펴는 글이란 글이 조선독립선언서로 단정되어 교도들이 화를 입는 소위 임오참변이 일어남에 다시 투옥되었다. 9개월간 고문을 당하다가 출옥 3시간 만에 일본이 패망할 날이 임박하였는데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때는 1943년 9월 4일(음 8월 3일)로 향년 50세였고 의사의 유해는 그해음 9월 2일 고향 선영하 해좌원에 반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