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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화경 동지와 함께 서울에서 독립선언문 한장을 양말속에 숨겨와 최정학 정용재 남종혁 제씨와 강제형 용덕면장을 만나 동년 3월 13일 의령읍내 시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우리 고장에서도 독립만세의거를 감행키로 모의하고는 당일에 배부할 독립선언문 등사의 책임을 최병규 전용선 두 분에게 마꼈으니 동지와 함께 불철주야로 이를 장성한 선생은 자진해서 야음을 틈타 의령군 전역의 뜻있는 인사에게 거사연락과 아울러 유인물을 돌렸고 두려움없이 3월13일 의령읍내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도 쪽지를 샆포하면서 행동을 선도하였으니 궐기한 군민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의대같은 함성은 천지를 뒤덮었으며 임시로 가설한 연단에선 구여순선생과 남종?씨의 일제 기만에에서 벗어나 조국독립이 이뤄질떄까지 우리는 최후의 일각까지 목숨을 걸고 투쟁하자라는 절규에 여기 저기서 합세한 인원수는 때마침 호응해서 달려온 의령보통학교 학생을 합쳐 삽시간에 무려 3천여명이 노도로 변하였고 만세운동은 시일당일은 물론이고 3월 15일에는 향교앞에서 또는 집에서 거리에서 봄비내리는 산마루에서 수삼일로 계속되었으니 실로 청사에 길이 빛날 장거였지만 급파된 왜병에게 검거된 100여명이 겪은 고문은 형언키 어려운 절치의 참상이었다. 동지 30여명과 같이 재판에 회부된 선생은 그해7월 25일 전용선씨와 동량인 1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으나 악형의 여독으로 누년 신음끝에 조국광복의 그날을 끝내 보지못한채 1931년 7월 15일 50세가 되는해에 애국단심으로 점철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