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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속에서도 애국정신은 식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놈이 같은 마을은 마을의 손씨집 처녀를 밀실에 가두고 농락한다는 말을 듣고 분기 충전하여 달려가서 그 처녀를 위기에서 모면케 하였다. 그러나 야욕을 못 다한 왜경은 그 처녀를 주재소로 연행하기에 다시 이러한 변을 막고 또 관가에 항의하기 위하여 뒤 따라가매 무인지경에 개발지석에 이르러 마침내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1842년 정월 대보름 저녁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 부인은 달려가서 고성 통곡으로 남편을 영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것이나 생후 2개월 된 어린 것을 길러 남편의 뒷일을 이을 것과 남편의 원수요 민족의 적인 왜경을 죽여 일본의 만행을 널리 경고 할 것을 생각하여 달려들어 그 곤봉과 돌로서 처서 죽였다. 이 일로 붙들려간 조씨 부인은 일본 관현에게 내 남편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 항의 하였으나 대구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매 수백 명의 환영 군중의 위로와 칭송을 뒤로하고 남편의 무덤(다리비등/참샘이) 을 찾아 그 날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니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조씨부인은 어린 아들까지 잃어 슬하에 일점혈육도 남김없이 1948년 3월 7일(음)에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에 온 고을 사람이 정성을 모아 갸륵한 이 부부의 일을 돌에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하니 이 두 분의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불어 빛을 한가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