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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학향과 덕행으로 인근의 추앙을 받았으며 증조는 휘 준식이요. 그 또한 학덕이 높았다. 휘 성기는 조요. 효행이 지순하였고 고는 휘 혁규요 총예강직하여 지조가 산과 같았으며 비는 밀양추씨 두영의 녀이니 공은 1880년 경진 4월 7일 함안 군북 사촌에서 1남 1녀의 독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강개의 뜻이 있어 국정과 세도가 날로 그릇됨을 통탄하더니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절치액완하여 나라의 수원을 갚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919년 기미 3월 서울에서 울러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3월 중순 독립선언서를 밀장하고 사촌을 찾은 변상태를 맞아 공은 조상규 조용효 조성규 등 일족과 더불어 책임을 분담하여 태극기와 선언서를 각 리동에 분배 연락을 긴밀히 하여 3월 19일 함안 구읍의 만세의거 다음날인 20일(음 2월 19일) 군북시일 기하여 일제히 봉기키로 하였다. 노도와 같은 시위군중은 일경의 주재소를 에워싸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니 극악무도한 일경은 맨주먹의 시위군중을 향해 발사선두에 서 대중을 휘동하던 공은 적탄에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때에 향년 40세 공의 처남 박주범도 의연히 거사에 참여 공과 함게 순의하니 죽음의 희생을 지음이 공 외에 18인이 더하였다. 아아 공들이 흘린 선혈은 조국의 영원한 근역을 진호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공의 순절비보를 접하여 경계가 밀엄한 현장으로 달려간 부인 박씨는 열두치마 폭을 찢어 시신을 감싸고 등에 업어옮기던 도중 뒤쫓아 온 두 아들과 간신히 향리로 운구 야음을 틈타 공동묘지에 몰래 모시니 일제는 죽은 분에게까지도 이렇게 잔학하였다. 공의 슬하에 3남1녀니 만제 한제 봉제요 여에 인동인 장봉도며 만재의 남에 귀래다. 국가의 애국지사묘역 정화사업으로 공의 묘소를 백이산 기슭 걸좌에 이장 배위 밀양 박씨와 쌍분으로 모시다. 아아 어계 선생이 어초로 소우하던 서산정 뒤 백이산은 오늘도 외외하여 백세청풍의 유방을 기리나니 어찌 공의 남긴 뜻이 천추에 푸르르지 않으랴. 어찌 겨레 백대의 스승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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