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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한문교사로 있던 그는 조한휘・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병, 강기수, 한관렬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이 배후 고문역할을 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같은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연락하였다. 이에따라 3월 19일 정오부터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장터를 출발하여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도처에서 일본 군경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후 그는 이곳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7년형을 받고 부산감옥 마산분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