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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석 안재성 한종순 조한휘 김상집 등과 모의하여 1919년 3월 1일 함안읍 시일을 택하여 의거하기로 정하였다. 공은 솔선 책임지고 왜경의 감시의 눈을 틈타 각지에 연락하여 신출귀몰하니 동지들 간에서 공의 용맹과 담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의거의 당일에는 함안읍내에 모여든 2천여 시위군중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공과 동지 수명은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소리는 천지에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은 일제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군청 앞 태평루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군청과 주재등기소 등을 점령하여 왜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니 몇 시간 후에 마산 방면에서 일본 무장군경이 쇄도하여 총과 칼로 위협하고 발포하자 군중은 흩어지고 공과 몇 동지들을 적수공권으로 매도항쟁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공은 소요죄의 명목으로 3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공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계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4년 2월 17일 저녁에 왜경이 인가의 처녀에게 추행을 범한다는 말을 듣고 분기를 참지못하여 달려갔는데 야욕을 못다한 왜경은 그 처녀를 지서로 연행하기에 뒤따라가매 무인지경에 이르러 왜경이 불의에 공을 쳐서 무참하게 숨을 거두게하였으니 공은 47세로 일기를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부인은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돌과 몽둥이로서 왜경을 때려죽여 부군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부인 역시 이 일로 대구감옥에서 4년형을 살고 나왔다. 이 조씨부인의 열행비는 함안군수 외 여러 유지의 힘으로 아라공원에 세워졌다. 이러한 일들로 이 부부는 일점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양자 필응과 손자 만영이 후사를 잇고 있다. 오호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