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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비밀히 선언문을 간직하고 돌아와 공에게 알리니 공은 즉시 향내의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9일 함안읍 장날에 의거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즉 이날 공이 수천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 시위하면서 적치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는 일대의거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왜적은 군대를 놓아 시위군중을 발포 저지시키고 관련인물 6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공은 마산법원에서 고문하는 왜적의 관리에게 사기가 늠름하여 큰 소리로 꾸짖기를 우리 한국은 사천년 예의의 나라로서 너희들 개 돼지의 치욕을 받은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우리 2000만 민족의 정의의 피가 끓고 있는데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는가. 나는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하면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했다. 수월 후에 대구고등법원으로 옮겨져서 3년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후 풀려나왔다. 공은 그 후에도 신간회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맹 안재홍 홍명희님을 위시한 많은 우국지사와 조국광복에 헌신진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마침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기 1935년 을해 음 5월 9일에 향년 54세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지난 서기 1977년도에 정부에서 공을 국가독립유공자로 표창하였다. 아아 조국이 광복된 지 어느듯 37년 왜적이 다시 우리 민족에게 모멸을 가하고 남북의 통일을 온 민족이 갈망하는 이때 공의 민족을 위한 자주독립정신은 우리들의 귀감이 될만 하므로 국가에서 묘비를 수립하였고 유지인사들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향 후배인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공의 의거에 관한 문적을 소고하여 위와 같이 약술한다. 공의 휘는 재형 자는 희숙 호는 도남이며 본관은 순흥이니 시조는 고려 상호군 자미이고 현조는 문성공 회헌 선생 유인데 공의 21대조이다. 죽계 선생의 휘는 희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나고 임진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웠으니 공의 11대조이다. 고의 휘는 기열이고 비는 선산김씨이며 본 생고는 성섭이고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