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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간호·2012년 봄 1919(27세) 상해에서 김두봉을 만나 한글 연구를 시작함. 상해 유학생 총무 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 지원 활동. 3·1운동 관계로 모여 든 민족지사(김동삼, 김원봉, 이범석, 신채호, 안창호, 이동휘, 박은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협의, 연락 사무를 담당함. 1920(28세) 2월에 동제대학 졸업. 가을 북경에서 독일 유학을 준비함. 의열 단 단장 김원봉과 의열단원 이태준을 만남. 1921(29세) 4월 신채호가 작성한「성토문」(이승만, 정한경 등의 미국에 대 한 조선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함)에 서명함. 6월 국제공산당 3차대회에 참석하려고 모스크바로 가는 이동휘 의 통역과 경호를 맡음. 9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3개월 간 체류하면서 이동휘를 도와 줌. 1922(30세)4월에 베를린 대학 철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인류학·언어 학을 부전공함. 유덕고려학우회에 가입함. 1923(31세)10월 베를린대학 내에 조선어강좌를 개설하고 3년간(1923- 1926)조선어강사로 활동. 같은 달 26일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 여 일제의 만행(관동대지진때 조선인 학살)을 규탄함. 1924(32세) 2월 역사서『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 (Unabha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 32쪽)을 저술, 배포함. 1925(33세) 포츠담에서 열린 국치기념식에 참여. 1927(35세)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단 장으로 이미륵, 김법린, 황우일, 허헌 등과 함께 참가하여 일 제 총독정치의 즉각 중지를 요구함. 5월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은“중국의 생사공업”(Die Seidenindustrie in China)임. 같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