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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간호·2012년 봄 에 대한 신념은 192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동포를 상대로 한 연설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박사는 국어는 민족의 생명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동포들을 감동케 하였습니다. 이 박사는 귀국하자마자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였으며 곧‘조선어사전 편찬위위원회’를 창립하여 간사장에 취임하 였습니다. 뒤에는 조선어학회 (한글학회의 전신)의 간사장으로서 동지들 과 함께 맞춤법을 만들고 표준말을 사정 (査定)하는 등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2년에는 일제가 날조 (捏 造)한‘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의 어학자 들과 함께 투옥되었으며 징역 6년의 최고형을 언도받기도 하였습니다. 해 방 후에는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간사장에 다시 취임함으로써 잃었던 우 리말과 우리글을 회복하여 이를 우리의 국어생활과 국민교육에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이극로 박사는 1948년 남북 협상차 북행한 김구 선생을 따라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 박사는 북한의 언어정책을 수립하고 민족어 연구를 올바르게 이끄는 견인차 (牽引車) 노릇을 하였습니다. 특히 1960년 후반부터 전개된 문화어 운동은 이극로 박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습니 다. 문화어 운동은 남한의‘국어 순화운동’과 차이가 없습니다. 일본어나 한자어로 된 어려운 말을 고유의 우리말에 뿌리를 둔 방향으로 쉽게 다듬 고 문장도 누구든지 알기 쉽게 써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자는 데 목표 를 두고 있습니다. 이극로 박사가 가신 지 올해로 서른네 해째로 접어듭니다. 만시지탄 (晩 時之歎)이 없지 않으나 우리는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추모 행사를 가졌고 앞으로도 이 박사를 추념할 수 있는 뜻있는 사업을 벌이려고 합니다. 오늘 부터 태어나는『고루 소식지』는 회원들에게 고루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보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기념사업회에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2.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