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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가흥2동, 고현동, 아지동 여러 이름이 있는 것 같다. 이교영 의병장의 수학터 삼수당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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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영 의병장은, 이명 : 龍潭 경북 영천(榮川)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 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교영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이명상(李明相) 의병장과 호응하여 거의한 후 1909년 피체될 때 까지 3백여 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강원도 영월(寧越), 충북 영춘(永春)·단양(丹陽), 경북 영천·풍기(豊基)·순흥(順興)·예천(醴泉)·상주군(尙州郡)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09년 3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경북 순흥군 쇠천리(釗川里), 풍기군 외면(外面) 신항리(新項里), 같은 면 고교리(高橋里)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순사대 등과 교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경북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서미곡리(西尾谷里), 영천군 금광석리(金鑛石里) 등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예천군 미울리(味鬱里)에서 일분군의 밀정노릇을 하는 등 매국매족 행위를 일삼던 일진회원(一進會員) 홍갈산(洪葛山)을 총살, 처단하였다. 또한 안동근 하암탑리(下岩榻里)에서도 일본인에게 의병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던 30세 가량의 부일협력자를 총살, 처단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11월경 일경에 피체되어 1910년 1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2월 2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