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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반남박공 송호 휘 린서 기적비 역 아아! 훌륭하다. 여기 고현리 산 8번지에 묘좌로 우뚝 솟은 봉분이 있으니. 이는 애국지사 박공이 묻힌 곳이다. 그의 위민행적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것이 있어서 어진 후손들이 괴정의 우측에 기적비를 세우고자, 자료 수편을 가지고와 명문작성의 책임을 내게 청한다. 돌이켜보니 만생의 무능으로 주제넘은 일이지만 동아일보 기사 및 대구복심범원 판결문과 영주시사를 보면 믿을수 있는 증거가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기술하면 어긋나거나 거짓은 아닐 것이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공의 휘는 린서이고 자는 인서, 송호는 그의 호이고 반남박씨이다. ...중략... 공은 1909년 7월 26일에 세거하던 화동자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송로공 문하에 유학하여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논의정직하여 점차 충효의절의 의지를 터득하니 사람들이 날로 우러러 보았다. 또 영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많은 장허의 업적으로 졸업하니, 그때가 곧 백척간두에 처한 심정으로 온 천하 살람이 한결같이 배일광복의 소망을 가슴에 지니고 있던 때였다. 풍진교중에 세태가 변하고 풍속이 달라지면서 일제는 끝없는 욕심으로 민주정신을 말살하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포박 구타 구금등으로 파가유린에 이르게 하였니 이는 우리 민족의 존망이 걸린때였다. 이에 공께서는 분개하여 반일의지로 신간농민양회에 가입하였고, 영주군 청년동맹간부로 공을 세워 큰 명예를 드높이셨다. 간혹 왜인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종일이념의 청년단이 있었으모로 공께서 1929년 5월 27일 김태두외 여러분을 데리고 순흥청년단 총무 차공을 찾아가서 해단을 경고하고, 그 뒤에 사람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동향을 살려보았으나 전향의지를 찾아볼수 없었다. 8월하순에 수차례 힐책하는 와중에 언쟁이 있지 않을수없었다. 이로 인해 대구형무소 감옥에 수감되어 만고천신을 당하니 모두 감내하지 못할거야 여겼으나, 공께서는 운명을 순리에 맡기시고, 그 험난함을 순탄한것처럼 여기며 10여개월만에 출옥했다. 한편 흉년이 거듭되어 군남의 오운지곡 사람들이 거의 굶어죽게되었을때 공께서는 달려가 급난함을 규휼하고 위로하며, "나의 성의이다"라고 말씀하였으니, 공의 큰 뜻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수 있다. 김용석 박흥양 박승대옹 등 먼저가신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송께서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문과 한글을 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