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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장백현지역 우리 독립군 총무 김두호를 통하여 독립군에게 군자금과 피복 등을 돕다가 1920년 6월 왜경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왜경에 압송되는 도중 탈주한 선생은 장백현지역 우리 독립군에 가담하여 함경도 일대의 왜경찰주재소 헌병지대 등을 기습 폭파 무기 탈취 등 많은 공을 세우고 1922년 겨울부터 함경도 지역 독립군 총무직을 맡아 꾸준히 왜적토벌에 분발하던 중 이듬해 8월 군경이 연합한 워낙 강대한 수의 기습을 입어 필사의 항전 끝에 마침내 이해수 김병국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잡혀 혜산 경찰서 북청검찰지청을 거쳐 함흥형무소에서 10개월간 복역 후 1925년 10월에 풀려나자 다시 독립군에 복귀하였다. 그무렵 만주 서문도 일대에는 왜군경과 그에 매수된 중국관헌들의 삼엄한 경비로 활동이 어렵게 되매 선생은 1927년 국내에 잠입 영남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에 진력하다가 1931년 초에 왜경에 잡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9월에 출옥되었다. 모진 고문과 옥고에 몸이 몹시 쇠약했으나 선생은 열혈의 기백에 경경일념이 오로지 구국에 있었기에 불편한 몸임에도 다시 만주땅을 찾아 독립군에서 활약했다. 칼숲을 헤치며 풍찬노숙에 신노심초로 선생의 건강은 날로 여위다가 마침내 극도로 악화되어 장백산 병영에서 요양하던 중 1937년 7월 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광복대업을 이루지 못한 사무친 한을 품은 채 43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시었다.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추서) 나라 걱정 겨레 사랑의 일관된 뜨거운 정성과 백절불굴의 의지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독립전선의 험난한 가시밭길에 평생을 이바지함으로써 국권회복의 초석을 이루신 선생의 숭고한 위업은 길이 청사에 빛나려니와 이제 선생의 후손과 고장 사람들의 정성으로 그처럼 높고 크신 공적을 삼가 돌에 새기옴은 선생의 위대하신 정신과 업적을 깊이 우러러기림과 함께 자손만대에 길이 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거울을 삼고자함에서이다. 선생은 의의 고장 순흥이 낳은 또 하나의 큰별! 애국애족의 표상으로 영원히 빛날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