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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단은 1913년 정월 경상북도 풍기에서 창설되었다. 초기 단장인 소몽 채기중과 동지들의 약 1년여 집중적인 조직사업의 결과였다. 이로써 民國(민국)을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對日대일 獨立戰爭(독립전쟁)을 준비.이행하는 革命機關(혁명기관)이 처음으로 광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내에 탄생한 것이다. 대한광복단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내의 강점세력에 대해 정면투쟁을 선포하며, 거의 10년간 그 세력을 유지했다는 의미에서도 대한광복단은 독립전쟁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정하고 있다. ■1. 시대적 배경과 목적 : 일제의 침략야욕이 나라를 덮쳐오던 시기,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0 정미의병까지 군대로 조직되어 수많은 전투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러나 결국 현대식 무기에 압도당하고 만 義兵戰爭(의병전쟁)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07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어 共和制(공화제)를 추구하던 新民會(신민회)의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가 첨예화하던 1909년부터 조직이 무너지는 1911년까지 점차로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대한광복단은 이러한 두 가지 큰 흐름의 정신을 계승하여 군대양성을 위한 군자금 확보, 악질 일인과 친일 모리배의 처단, 궁극적으로는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 초기 결성과정 : 채기중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만주를 여러번 드나들던 그가 1912년 봄에 서간도에서 趙聖鎬(조성호)에게 거액 500원을 건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동지규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극적인 조직사업은 1912년 봄 이후이다. 의병장 출신 지사들, 젊은 용사들, 풍기 주변의 지인들이 참여했다. 채기중은 冒險勇士隊(모험용사대)의 양성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 80여 명의 인원이 확보되었다. 이 시기 충북 제천의 근북면 면사무소 습격, 영월의 중석탄광 잠입, 친일부호들의 금고탈취 등이 단행되었다. ■3. 재정기반과 동지규합 : 채기중, 김원식, 정성산 세 사람이 재산을 내놓았고, 팔도에서 모인 유창순, 장두환, 유장렬, 김병렬, 한훈, 정운기, 정진화, 강순필, 김상옥, 정만교 등이 창립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양제안, 양한기, 양한위 삼부자와 예산의 김한종 등은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로 협조하고 있었고, 충청.전라.평안도의 지사들이 지속적으로 영입되었다. 1914년에는 밀양의 황상규, 김대지 등이 합유하였고 단원 수가 거의 200에 달했다고 한다. ■4. 영주 대동상회, 풍기학교훈도인 박제선, 춘양교원 류명식, 박계양, 정의국, 이교덕, 권영목 등을 통해 풍기, 순흥, 영주, 춘양, 내성의 자산있는 이들을 망라하여 영주읍내에 대동상점을 차렸다. 금고는 권영목이 관리하였으며, 여기서 모인 자금 수만원은 안동에 두었다가 만주를 통해 무기를 구입하였다. ■5. 군대식 조직개편과 광복회 : 1915년 소몽 채기중과 고헌 박상진의 만남은 조직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었다. 양제안의 조언으로 박상진은 이복무와 함께 풍기의 채기중을 방문하였고, 이들의 의기투합으로 대한광복단은 군대식으로 재편성되며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거듭난다. 박상진을 총사령,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하고 각 지역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지부장은 경기 김선호, 황해 이관구, 강원 김동호, 평안 조현균, 함경 최봉주, 경상 채기중, 충청 김한종, 전라 이병찬 등이 맡았다. 12월에는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가 설립되었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았다. 채기중과 박상진은 수시로 연락하며 모험용사대와 연결하였으며, 대구의 상덕태상회.영주의 대동상회 등이 거점역할을 하였다. ■6. 대한광복단 재건, 박상진 등이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조직의 정체기가 오자 채기중, 한훈, 노백린, 김좌진, 홍현주, 기병섭 등이 1916 조직을 재정비하여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7. 친일 악질관리의 처단, 1917년 11월에 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엄세규가 경북 칠곡의 악질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고, 12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김한종, 장두환 등이 주관하여 처단하였다. 이로써 광복단과 광복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일경은 발칵 뒤집혔으나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8. 지도부의 체포 : 일경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미끼를 던졌던 바, 결국 천안의 이종국이 밀고하였다. 1917년 12월 16일에 충청지부장 김한종이 20일에는 총사령 박상진이 체포되었다. 그래도 충청과 전라에서의 군자금 모금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이듬해 7월에 목포에서 채기중이 체포되고 이어서 다른 많은 임원들이 체포되었다. 주요간부들이 1921년 8월에 사형당하며 주류부대는 와해된다. ■9. 독립전쟁사에 끼친 영향, 국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는 믿음은 삼일운동이라는 거대한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8년 말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명 중 세 명 이상이 광복단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밀양출신 황상규와 김대지 등은 1919년에 義烈團(의열단)을 창설하였으며 황상규의 처조카인 김원봉은 특별훈련을 받아 의열단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나중에 독립군과 광복군 형성과정에도 대한광복단 출신이 많이 참가한다. ■10. 대한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 삼일운동이 일어나서 혁명의 분위기가 국내에 확산되고 임시정부가 상해에 서게 됨에 따라 남은 대한광복단 단원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충 강력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보다 먼저 김상옥, 김동순, 한훈 등 20여 명이 결사동맹 행동반인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에 미국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조선총독 齋藤實(사이토 마코토)의 암살 등의 행동으로 민족의 진심을 천하에 알리려 했으나 결행을 하루 앞두고 대부분 적에게 체포되고 김상옥만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상옥은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0여 일간 일천여 일경들을 전율케 하다 끝내 자결하였다. 이 거사로써 대한광복단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해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 1945년 10월에 한훈 등은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해 대한광복단을 재건하였으나 조국의 분열과 전쟁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조국을 이루는 과제는 우리에게 남겨졌다. 2021년 8월 일,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