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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선생은,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9일 경북 영주군 풍기면(豊基面) 풍기시장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풍기 지역은 1913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같은 열혈적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항일적 분위기가 짙던 곳이었다. 또한 풍기 시장은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의식을 키워가던 김용준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풍기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풍기 만세 운동은 4월 2일 안용호(安容鎬)·최성원(崔盛源)·남영진(南永鎭) 등이 4월 9일 풍기 장날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용준은 이들의 계획을 접하면서 즉각 찬동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나갔다. 김용준은 거사 당일인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이 때 만세현장에서 피체된 안용호 등 동지 3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군중 1백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 헌병에 의해 피체되었으며,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