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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달연은 순흥(順興)에서 살았으며 본은 봉화(奉化)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래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인의 횡포가 심해지자 1905년 영주(榮州)에서 김낙임(金樂任)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 순흥의 일헌병 분견소(日憲兵分遣所)를 비롯하여 인근 일대의 일군과 접전하였다. 그 때 문경(聞慶) 사람 이강년(李康 )이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907년 음력 8월에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이강년의 중군장 김상태(金尙台)의 진중(陣中)으로 찾아갔다. 금달연은 이강년을 뵙고, "달연이 김백우(金白愚)선생께 몸을 바친지 해가 넘었사온대, 지금 백우선생의 명으로 감히 뵈오니 죽이건 살리건 처분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이강년은 도독장(都督將) 이만원(李萬源)을 불러 별초종사(別抄從事)로 임명케 하였다. 1908년 이강년의 종사부(從事部)에서 활약하다가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그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영주 단양(丹陽) 일대에서 왜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왜군에게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종신징역(終身懲役)을 언도받아 복역 중 1914년 10월 21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