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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을 따른 집안 청년들 중 권오상(1900~1928)과 권오운(1904~1927)은 각각 6·10 만세운동 때 구속된 뒤 각각 1928년과 1927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권오설마저 1930년에 옥사해 한 문중의 세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스크바 동네'라 불릴 만큼 가일마을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무게는 만만찮다. 조선노동총동맹 중앙 집행위원을 지낸 안기성(1898~?)도 가일 출신이다. 그는 해방 후 월북, 한국전쟁 중 유격대 제7군단의 이른바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나 1953년에 숙청되었다. 그 외에도 해방 후 안동에서 치안유지회 간부로 활동한 권오헌, 강동정치학원 1기생으로 학가산 유격대를 이끌던 권영남이 있다. 이들이 마을에 남긴 자취는 결코 가볍지 않다. 대체로 고통의 상처로 기억되는 역사지만, 이 마을 청년들이 맨몸으로 부딪친 것은 겨레의 아픔이었으니 민족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들의 투쟁과 희생은 마땅히 기려져야 할 터이다. 마을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조상인 ‘병곡 권구도 권오설을 자랑스런 후손으로 여길 거’라는 김희곤 교수(안동대)의 지적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④]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잊혀진 시대와 삶 -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