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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공훈록에 주소는 나와있지만, 김규식(金圭植), 김정식(金政植), 김만식(金萬植)선생의 집터는 없는 번지이다. 김규식(金圭植)은 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7년 경북 안동에서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의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하기 전부터 신민회에서는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김규식은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11년 김형식(金衡植)·이형준(李衡濬)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에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부민단(扶民團), 자신계(自新契), 교육회 등을 중심으로 유하현·통화현(通化縣) 등 각현의 지도자들을 모아 한족회(韓族會)라는 재만동포의 자치기관이 설치되었다. 한족회는 재만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에 본부를 두었다. 김규식은 이때 이 단체에 참여하여 학무부장으로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그는 한족회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부는 1926년 말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87,000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그리고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그리고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다. 김규식은 독립군 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봉천성 무순역(撫順驛)에서 동아관(東亞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