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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대가의 영예가 더없이 형형하다. 그래서 수졸당의 이끼가 사시에 창연한 것이다. 근현대 백년사에도 찬란한 발자취를 남겼다. 1894 갑오왜란이후 국운이 위태로울때마다 몸을 던진 하계인이었다. 구한말 의병전쟁에서는 의성의진을 결설하여 싸웠고 젊은이들은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에 참가하여 계몽주의 확산에 힘쓰면서 보문의숙을 설치하여 구국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운명을 다하자 만도 중언이 단식순절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그때의 임종기록이 청구일기이다. 이어 원일은 독립군 기지개척을 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중업은 상복을 입은채 큰집주손 원일과 처남 김대락과 동서 이상룡의 망명길을 도왔다. 나라는 쇠락해도 푸른 가풍은 피어나는 장엄한 광경이 아니던가. 하계촌이 독립운동의 고장이 되었다는것이 우연이 아니다. 1913년 광복회는 도곡리 이종영가에 이어 1917년에는 하계촌 토굴에 본부를 두었고 1919년 삼일운동때는 김창숙과 더불어 만규 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만규 이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비호 이동봉 이기호 이용호 이극호 이호준 이운호 이열호 이상호 이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