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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학교 사적 여기는 계몽운동의 본산이며 독립운동의 산실인 협동학교가 있던곳이다. 유림의 고장인 안동에서 1895년 의병봉기로 서장을 였었던 근대민족이 1904년부터 계몽운동으로 방략을 전환하였다. 유인식의 혁신적 개화와 김동식을 중심한 천전문중의 진보적 용단으로 이 곳에 있던 하산서당을 협동학교로 개편하자 계몽주의의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 쳤다. 유인식 김후병 하중환의 발의로 1907년에 개교한 협동학교는 이 고장의 유일한 중등학교로서 김병식교장을 비롯한 김동삼 이강인 이관식 김기수 안상덕 이종화 김형식 김하정 김철훈 박태훈 박준서 김진황등 경향에서 모여든 애국지사들이 이 교단을 지켰다. 해묵은 지?을 해치고 신문명의 전당으로 우뚝선 협동학교는 때마침 서울에서 일어난 신민회와 손잡고 구국방책을 모색하는 한편 교남일신에 정성을 다했다. 그런가운데 김기수 교감등이 순국한 시련을 격기도 했으니 협동의 홍지는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때문에 젊은 지성을 불태운 건학정신은 경술국치후에 더울 빛났다. 국치를 당하자 김대략 이상용 김성로 이원일 유연화 등 백여호가 망명길에 올라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살아있다는 교훈을 만들어 낸것이다. 바로 1911년 서간도에 세운 경학사와 신흥학교가 망국?변한 협동의 장한 모습이 아니던가. 그 기조위에 독립전쟁이 찬연하게 전개되었다. 1914년 백서농장과 1919년 부터 결성한 서로군정서 통의부 정의부 고려혁명당 혁신의회 국민부등이 그 분들의 적성이 단기 독립군단체였다. 1923년 김동삼이 국민대표회 의장으로 1925년에는 이상용이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상해에 머문때가 있었으니 이 고장의 인사들은 줄곧 남북만주를 오내리며 독립전쟁에 몸바쳤다. 그 열매가 8.15광복이었고 그 혈투의 공덕위에 오늘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망명이민이 떠난후에 유동태등의 청년지사들은 여방을 수습하여 협동학교를 수곡 한들로 옮겨 교장은 유연갑이 맡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19년 문을 닫을때까지 거기에서 꽃피운 민족교육은 3.1운동과 안동 신간회등으로 영글어 청사를 새롭게 빛냈다. 이와같이 협동에 연원한 일선양맥의 광명은 우리 근대사의 격을 다양하게 드높였다. 그동안 일제의 만행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마을마다 잡초에 묻힌 눈물겨운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인고의 삶으로 지켜온 정의의 길은 오늘날 온겨레의 축복을 받고있으나 그때의 희생과 아픔이 어찌 영광스런 자랑이 아니리오. 모름지기 값있는 인생과 의로운 역사를 찾는이는 협동학교 사적에서 그 지혜를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