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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않았다. 선생은 을미늑약후로 창궐해가는 왜적을 소탕하려고 고종 병신년에 안동 의성 예천등지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기를 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와 침통히 지내다가 정미에 의장 민긍호 이강년등의 거사에 많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몰아드는 광란을 쌍수로 막을수 없었다. 왜적은 소위 통감부를 설치하여 국내외치권을 박탈하고 모든 조세는 왜고에 들어갔다. 선생은 비분을 못이겨 서산가를 지어 읊으며 통탄하시다가 왜놈의 백성은 될 수 없다하고 자질(子姪)을 불러 내가 죽거던 빈소는 차려 곡읍(哭泣)은 하여도 상식(上食)은 하지말라 왜놈의 천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으니 우리 국권이 회복되는 날 올이도록 하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긴 뒤 단식한지 23일만인 순종 무신 9월 28일 사시에 향년 69세로 고요히 순절하시니 백일에 뇌성이 울이고 상진이 쳤다. 동년 11월 19일에 풍천군 감천면 진평동 근인산에 장사를 모셨다가 기후 영주군 안정역 후산으로 이장하다. 혈육으로 장자 낙용은 대표라 이름났고 계자 낙문은 선생의 뜻을 이어 의거를 하다가 3년 6월의 옥고까지 겪었다. 아! 슬프다. 선생의 강명한 기품과 해박한 학문으로 승평세월에 사셨던들 의당 조당에 올나 이 나라 이 민족으로 가장 행복된 군민이 되게 하였을 것인데 천운이 불행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의기를 들고 초택에 분투하다가 망국한의 제단위에 욕사의 제물이 되셨으니 누구인들 통석치 않으랴. 그러나 그 송백같은 절조와 일월같은 충의는 서산의 이제인들 더할 수 없고 동해의 노연과 동궤일철이라 하겠다. 다만 문사가 졸눌하여 그 탁행고절을 원만하에 현양하지 못함을 송구히 여기면서 감수하고 삼가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