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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중산 권원하선생 독립기념비이다. 선생의 자는 도장 호는 중산 관향은 예천인데 졸재 오기의 14대손이다. 서기 1898년 무술6월 17일에 예천 용문면 금곡리에서 영진의 아들로 태어났었다. 명민한 자질로 어릴때부터 신구학을 겸치하여 왜관공립보통학교에 제1회로 졸업하고 부산 제2상업학교를 수료하였다. 1919년 을미3월에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22세의 청년으로서 우국열이 북받쳐 왜적의 포탄을 무릅쓰고 선두에서 만세를 외쳤었다.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자 지하운동으로 활약하면서 권세형 엄시일이라고 변성명까지 하였다. 조국광복을 꼭 해야겠다는 정신이 왜인의 만행에 따라 더욱 불타올라 주거지를 서울 가련동으로 옮겼었다. 배승환 이재영 조대행 권재수등 모든 동지와 규합한 다음 주야를 가리지 않고 구국에 전력하였다. 이 때 수많은 동지가 노도처럼 일어났으나 적수공권으로 대항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주로 거너갈 계획을 세웠다. 이때 김영철 이도성 조강제 동지들의 길 안내를 받아 김종협과 함께 만주 유하현으로 달려가 임정소속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군사교육을 마치고 1920년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즉시 대동단조직 김가진의 지령에 따라 무관생도모집및 군자기금수렴을 위해 본국으로 되돌아 왔었다.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맡은 임무를 이행중이었는데 왜경에게 피체되어 미결수로 수개월과 2년 선고를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한 후 중앙일보 지국장을 맡은 다음 앤재홍동지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여러동지들의 활동비까지 제공하였다. 민종의식의 고취와 왜적만행의 성토에 대해 삼엄한 기백과 침울한 통분이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