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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과 차성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규홍은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변보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런데 1896년 1월 이강년이 의병진을 일으켜 활동하자 암암리에 내통하여 동지의 의를 맺고, 일제를 구축하는 계획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모집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강년 의병진이 친일적 행위를 한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때때로 사람을 의병진에 보내어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 후 그는 1905년 안동의 석주 이상룡, 서울의 심연 김현준, 거창의 은표 차성충, 영춘의 백우 김상태 등과 혈맹으로 뭉쳐 의병활동을 모의하였다. 특히 그해 11월 을사륵약이 강요되자 그는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고, 그해 11월 김심연·차성충이 김천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하였을 때 큰 아들 이지선을 보내 도왔다. 그 후 이지선을 이강년 의병진에 보내 활동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규홍은 1907년 김현준·차성춘 등과 의병의 계책을 모의하고, 그해 8월에는 금룡사에 유진하는 이강년을 방문하여 의병활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이상룡이 사람을 보내어 군자금을 요청하자 아들 지선과 사위 이세형을 통해 거창의 차은표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차은표로 하여금 가조산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차은표 등은 1909년 의병 수백 명을 규합하여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차은표를 대장으로 김상태를 중군장으로 삼아 풍기·순흥·영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5월 차은표가 순국하면서 의병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1913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그이 아들 이문극을 이규홍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극을 만나 국외와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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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 洗心軒 星州 二公 圭洪 事蹟碑(의사 세심헌 성주 이공 규홍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