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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걸은 지령이라 태백의 줄기 뻗어 비봉산 솟고 낙동강 구비쳐 흐르는 예천땅 지보는 국난기에 애국지사가 배출된 곳이다. (生於民族 死於民族 : 생어민족 사어민족)하고 은근과 끈기의 민족혼을 주창한 국문학계의 거성 도남 조윤제 박사 또한 이곳 출신이다. 님은 함안인으로 1904년에 부 용범과 모 청주한씨의 차남으로 출생하니 천자영매하고 기절이 웅위활달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다가 예천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단1인의 조선어문전공생으로 입학하여 제1회생으로 졸업하였다.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혼자 걸었으니 님은 원대한 포부와 불굴의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라 망하니 말글이 온전할 리 없어 국정은 학교교과에 조선어 줄여가고 한인 스스로도 자국어문을 소홀히 할 때 님은 경성사범에서 조선어를 강의하며 국문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시가사강을 출간하니 국문학연구의 큰 길잡이가 되었다. 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에 더 전념하기 위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진성전문의 연구실에 들어 동지들과 토론하며 민족사관을 확립하니 범인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생계를 위해 한문서예강사로 전전하였으나 국학연구는 계속하였다. 광복이 되자 감격 남다른 님은 서울대학교 문리대교수 겸 학장을 역임하고 국문학사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님은 남북협상 때 김구 조소앙 선생을 따라 평양에 동행하고 4.19때 교수 데모에 가담하며 교수협회의장을 맡는 등 현실에 참여하여 곤욕을 치루고 한일협정 반대로 대학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서울대학교수를 사임하고 성균관대의 교수로 전임되어 대학원장 부총장을 역임하여 학술원상을 받고 명저 한국대학사를 출간하였으니 이 책은 바로 선생의 자기표현이었다. 님은 이 밖에 10여권의 저서와 50여편의 논문을 내어 국문학계에 길이 빛날 업적이 되고 있다. 화갑에 기념논문집과 도남 난훈록의 헌정이 있어 당대의 석학문사와 문인의 축하가 있었다. 이때 월탄 박종화와 노산 이은상의 풍죽시가 나오고 옥호를 풍죽헌이라 불렀다. 님은 갑오 후 향토 대구의 청구대학교수로 취임하여 영남대교수로 퇴임하기까지 10년간을 대구와 인연을 맺으니 영남인사는 선생의 엄정한 학풍과 늠름한 기상과 검박한 서민성을 흠모하여 마지 않았다. 님은 학술을 통한 지인용 구겸의 학자요 애국지사라 할 수 있겠다. 님은 1976년 4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애세하니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덕은리 옥석산에 1972년에 작고한 배위 수원백씨와 합장하였다. 유족에 4남 1녀 있으니 시래 용래 복래 상래와 박우승에 적한 문래이다. 2002년 임오 4월 청명절 청송 심재완 글 짓고 족제 양제 삼가 씀 도남 조윤제 박사 연보 1904.1.26. (음 12.10.) 경북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출생 1916.2 수원백씨와 결혼 1919.3 예천공립보통학교 졸업 1924.3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1929.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졸업 1945.12.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1948.4 남북협상 차 평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