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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모(鄭燻謨) 선생의 호는 추산(秋山), 자는 국렬(國烈)이며 1888년 3월 20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 우망리(憂忘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4년 27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중국 남만주(南滿州) 지역에서 독립투쟁을 시작하였다. 백범 김구(金九) 선생과 형제의 의(義)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남만주 동사촌(東社村)에서 애국지사 유시언(柳時彦) 선생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창단에 참여하고 성동학교(盛東學校)를 설립하여 청년 광복군 배출에 힘썼다. 또한 거주지역 교포들의 생계를 위해 농업교육을 장려하고 독립군의 식량을 확보하였다. 1919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와 소통하며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측근으로 항일투쟁에 주력(主力)하였다. 1920년 2월 이후에는 남.북만주일대와 한국 국경 부근에서 무장투쟁을 하며 일본 기관과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 관공서를 불태우며, 일본군을 폭탄으로 제거하였다. 1925년 6월 미쓰야협약(三失協約)으로 일본 경찰과 중국인까지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자 선생은 일본인 경찰을 살해하고 북만주(北滿州)로 이동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39년 초 동지들과 시베리아 아르하라(ARKHARA)에서 자무쓰시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자무쓰감옥에서 복역 중 심한 고문으로 위독하게 되자 병보석 되었으나, 1939년 4월 7일 중국(中國) 싼장성(三江省) 자무쓰시(佳木斯市) 삼남여관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향년(享年) 52세를 일기로 25년간의 독립투쟁을 마감하고 순국(殉國)하였다. 해방 후 정부는 선생께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이 묻혔던 공동묘지는 주거지로 변해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어, 선생의 위패와 우망리에 모셨던 아내 남영선(南英先)의 유해를 2019년 4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奉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