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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식 선생은, 1932년 6월경 경북 예천군(醴泉郡) 개포면(開浦面) 금동(琴洞)에서 ML당사건으로 복역하다가 1931년경 출옥한 한일청(韓一淸) 등과 함께 예천적색농민조합(醴泉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였다. 그 뒤 영주(榮州)·봉화(奉化) 등지에서 결사사건이 발각되자, 예천농민조합을 해산하고 동년 11월에 예천무명당(醴泉無名黨)을 결성하였다. 즉 한일청·박철호(朴鎬哲)·김기석(金己石) 등과 함께 모여 한국의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1933년 6월경까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고 농촌진흥조합의 적화(赤化)를 비롯하여 무명당 산하에 사방(砂防) 그룹, 역(驛) 그룹, 교원(敎員) 그룹, 봉급자 그룹 등의 결성을 추진하면서 결사의 확대 강화, 주의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무명당 결성 이후 조직부를 맡은 윤우식은 윤태혁(尹泰赫)·윤성복(尹成福) 등의 동지들을 포섭하고 야학회 및 소비조합 설치 등을 도모하는 한편, 지보면(知保面)의 농촌진흥회를 이용하여 이립금(利立金)을 만들어 활동자금으로 삼았다. 예천무명당 사건으로 1934년 초순 이래 35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11명이 1935년 5월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그는 그 후유증으로 공판에 회부되기 전인 1934년 10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