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page


188page

중동학교와 안동 가일 원흥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 때 학교가 없었던 게포면의 권건수(1871~1952) 면장은 학교 설립과 교사신축에 힘을 보냈다. 일제는 계동학원에도 수신과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였는데 조선학생들을 저들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어서 식민통치에 순종케 하고 나아가 독립의 의지조차 품지 못하게 하려는 우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냉대하다가 마침내 교육과 사용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계동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수시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실력을 길러야하며 더 나아가 일제의 탄압을 물리쳐야 된다고 가르쳤다. 배고품을 참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면서 선생들은 더욱더 온 힘을 다해 가르치니 왜경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다. 학원설립 후 3년쨰가 되던 1925년 3월 27세의 청년 박 학감은 '예천의 교육계를 대표'라는 인사라고 서울에서 찾아온 동아일보 특파원과 회견하였는데 이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어 전국에 계동학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무산자교육기관으로 전 조선에 모범임을 자랑하던' 학교는 1926년 3월 초 경북도지사에게 학원재인가 신청서를 제출하니 교사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교체해야 된다고 반려하였다. 그래서 학교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던중 때마침 순종황제 인산 날 6.10만세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인 탄압에 광분하던 일제는 그해 10월 6일 경북도지사 명의로 폐쇄명령을 내렸다. 10월 9일 학교와 선생을 믿고 따르던 60여명의 마지막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공부를 계속해야 된다고 당부하면서 '계동학원의 폐쇄'를 선언하니 선생과 학생들은 통곡 끝에 눈물로 작별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왜경은 그날 오후 선생의 연설내용을 문제 삼아 예천경찰서로 구인해가고 학생명부 등 학교의 주소 서류도 모두 압수해 갔다. 계동학원이 없어진 이듬해 1927년 2월 박창호 선생은 계동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개포 경진에서 야학을 열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박 학감을 비롯한 네분의 선생은 가난한 농민을 보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