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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 경북 예천·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격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자주적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이듬해 통감부가 설치되어 통치권을 장악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안재극은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되고 있을 무렵 그는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을미의병을 전개하였다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강년 의병부대는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이강년 의병장은 대담한 유도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적들에게 피체되었어도, 그의 부장들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안재극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1910년 8월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 의지에 불타는 그는 일제의 주권 강탈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8도의 동포에게 고하여 삼군을 규합해 일제를 타도하자"는 「격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여 항전하려는 의도에서, 동지인 이지원, 이승재, 한양이, 윤태휴 등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격문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 그는 이강년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순국하자, 그의 장자 이승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등 운동자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이강년 의병장을 추모하여 1919년 『운강이공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