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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선생은 1907년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 해산병이 주축이 된 민긍호의진과 합세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추치전투, 죽령전투, 고리평전투, 백자동전투 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광무황제는 밀지를 내려 그를 도체찰사에 임명하며 의병활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해 12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2∼4월간에 전개된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안동 서벽전투, 봉화 내성전투, 안동 재산전투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은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이범용은 좌종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