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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병대요 호는 금포이시다. 광주인 경평공 노고의 후대요 후재 극신의 사손으로 일찍 성재 허전선생의 문하에서 독학하셨다. 선생은 서기 1857년 12월 4일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서 탄생하시니 본성이 충직하사 성장하심에 따라 매양 국사에 대한 우국충정으로 한세월 지내오시던 중 서기 1889년 고종26년 ?축에 창능참봉에 제수되셨다. 당시 구한말의 풍운이 험악일로로 횡행하고 있을 무렵 서기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의 비보를 들은 들으신 선생은 북향 통곡하신 뒤 분연 상경하시어 왕의 밀소로 얻어 분충서란 2등 공신 비서원 비??이란 특차에 제수되셨다. 선생은 성은의 망극하심에 감루를 흘리시며 즉일 귀향하시며 창의거병에 진력하시니 각 지의 의사장병 200여명이 일시에 규합되었는지라 때는 서기 1907년 속리산을 중심삼아 왜병격퇴에 파죽지세로 분전에 분전을 거듭하셨다. 이 때 왜적의 강압으로 우리 관군이 해산되자 이에 의분을 품은 경병 수백명이 선생의 의거에 부합하니 그 정예병세는 천여명에 달하셨다. 이에 선생은 의병대장에 추대되셨다. 먼저 보은 일대를 진격하여 왜적 수명을 사살하고 다시 상주 청계사로 또는 충주 미원으로 진지를 이동하는 한편 격전고투끝에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또 다시 호남일대를 거쳐 성주에 이르러 대전첩을 이루었으나 거창에서의 대전투에는 중과부적이라 겨우 십여적단을 무찔었을 뿐 우두령에의 대치에는 전세의 불리함을 어찌할수 없이 부하의 선혈만을 강하에 뿌려둔채 무변도강의 천추의 유한을 품고 다시 속리산중으로 이진하니 암은 군사 겨우 오십여명이라 선생은 앙천통곡하신 후 잔병을 위로하면서 투지를 잃지 않고 다시 의사들을 정비 재편성하여 출몰무쌍으로 적과 격전에 혈한이 되었으나 ?불득지라 어찌 하오리요 통분하도다. 적의 마수에 피체되시니 때는 망국을 이년 앞둔 서기 1908년이었다. 가소로울 손 왜적의 비인도적 행패로 선생을 모셔놓고 소위 고문의 일문일답은 선생의 구국충절의 민족적 전통을 제 아무리 잔혹 한들 어찌 할려고 감행하였던가 참으로 천인공노 할 장면이었다. 적의 헌병대장과 문답을 실지 그대로 전한다면 다음과 같다. 문: 거사자자가 몇사람인가 답: 내가 주모인데 다른이는 무엇 알것있느냐 문: 죽음이 두럽지 않느냐 답: 거사 할 때에 벌써 死字가 이마에 붙였던 터이다. 속히 죽여 달라 고한 의연한 태도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 뿐 이니라.정정당당 적을 꾸짖고 호통하셨으니 선생의 됨됨과 나라 위한 충심이야 말로 죽음을 두러워 했을손가 이 때 적의 야수적인 고문으로 한 눈을 실명 당하였으며 1910년 국치의 한일합병이란 소위 경축의 특사라는 미명으로 출옥케 하였으나 또 다시 1913년 3월에 동지들 재규합 의거타가 체포되어 대구재판소에서 가증할 손 강도의 누명으로 15년 형을 받았으니 하늘도 무심토다 경국지 한을 어디에 호소하오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