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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및 신명교 화약도감의 전략에 따라 병원을 증강하고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당시 영춘에서 기병하여 청풍에서 대장이 순국할때까지 1년간 30여회의 격전을 태백과 소백의 산악지대에서 장마와 폭설을 무릅쓰고 밤에는 기습공격하고 낮에는 매복유격하기 위해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량과 화약 심지어 의복과 신발까지도 어김없이 공급하는 임무를 완수한 좌종사들의 공적은 결코 적지않았으며 전과에 미친 영향 또한 매우컸다. 대장이 순국한후 그가 임종때 팔역의 동지에게 고결한 유서를 전해 받아 이를 해역하여 널리 배포. 복수를 다짐하는 한편 운강의 장자 승재와 묵랑의 자 양이와 함께 중군장 김상태를 대장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소백산에서 활약하다가 양이가 왜적에게 잡혀 부득이 모두 흩어졌다. 경술년(1910년) 동래에서 국치의 비보를 받고 통분하여 침식을 잊고 고심하다가 심화병을 얻어 종신토록 고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집옆에 세운 양파정에 새벽마다 올라 북향사배하고 통곡하며 광복을 다짐하기를 고종이 승하할때까지 10여년간 계속하였다. 도이의 강점기에는 항절을 더욱 굳건히 하여 왜경의 위협과 감시에 굴하지 아니하고 의관과 보발및 예절을 옛 그대로 지키고 동지들과 함께 서당을 운영하여 후진에게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선생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1년 앞두고 통한을 품은 채 임정 26년(1944) 9월 3일에 고종하여 상주시 외서면 가곡리 성전산 곤좌에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