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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559-3 생가터 앞 열사 금포 노병대 선생 순국비를 찾아왔다. 노병대는 후재 극신(厚齋 克愼)의 후손으로서 경북 상주 화령면 관제리(尙州 化寧面官堤里)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여 성재 허 전(省齋 許傳)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89년에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895년 향교가 폐하여 짐에 상경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중국 곡부(曲阜)로 가서 공자의 사손(嗣孫)을 만나고자 하였다. 귀국하여 조종과 태학(太學)에 그 문제에 대하여 다시 충고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호남지방에서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 여덟 군데나 있었다. 그는 곧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하여 모두 파 가게 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었음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고 서울로 올라가 판서 이용원(判書李容元)을 통하여,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 비서원 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특별히 제수한다." 는 밀조(密詔)를 받았다. 이에 그는 환향하여―그의 거주지는 충청도인 듯 하다―동지 약간 명과 함께 거사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전 주사 임용헌(林容憲)·충남 연산(連山)군에 사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과 함께 속리산에 들어가 거의하니 응모하는 사람이 2백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군대 해산으로 경병(京兵) 수 백 명이 내부(來附)하였다.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고, 보은군을 공격하여 일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 청계사(尙州淸溪寺)로 진을 옮겼다. 그때 적병이 급습하여 청주 미원(淸州米院)으로 패주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적 5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미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오래 머물 만하지 못하였다. 군대를 나누어 노병대는 호남을 거쳐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 십여 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거창에서 또 다시 적의 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이렇듯 노병대의 의병부대는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남 거창·안의, 전북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다시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러 크게 패하고 속리산에 돌아오니 군사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1908년 6월 15일(음력)보은의 관주점(冠酒店)에서 일군에게 붙잡혔는데 그 당시의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이처럼 그는 거사할 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터이었다. 그 후 공주재판소로 송치되었다. 그가 끝내 굴하지 않자, 적은 그의 한 눈을 제거하였다. 단식하여 자진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국권침탈조약 늑결시 특사로 풀렸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버티다가 강제로 출옥 당하였다. 다시 재거를 획책하다가 1913년 3월 12일(음력) 체포되어 대구재판소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단식 2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그때 일인은, "강도 노병직(그의 초명)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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