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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헌 선생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885년부터 1901년까지 경북 선산(善山)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02년 상경하여 외국어학교 일어과(日語科)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903년 하와이의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시 지원하여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이주 후 약 3년간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였으며 1907년부터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 후 1910년 미주 본토 뉴욕으로 이주하여 해외 한인의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뉴욕지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1914년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 8명이 민족의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에 가옥채보상금을 출연하여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하자, 동대회에 참가하여 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 후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같은 해 11월 전후(戰後)의 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원동정책(遠東政策)을 획정할 목적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5대열강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고 대한민족대표단(大韓民族代表團)을 조직하고 국내와 연락하여 '대한 인민의 건의서'를 작성·제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에서 대한민족대표단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원익(李元翊)과 함께 동방으로 파견되어 동포들로부터 특연금 219달러를 모집하여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하였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大韓民族代表團)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파견된 그는 동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동년 7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국민대표회주비회 등과 임시정부의 조직성격 문제를 놓고 대립하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하고 임시정부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1923년부터 17년 동안 미 중서부 지역인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한인 동포들의 생활과 자치활동을 적극 후원하여 '한인들의 은사'라고 불리웠으며, 1933년 시카고에서 일본인 송강(松江)을 처단하여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고 계획하기도 하였다.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최능익(崔能翊)등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자,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의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書記代表)로 활동하면서 중국군대 후방공작을 협조하였다. 1940년 시카고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그는, 1942년 한국인의 대동단결과 미국 군사정보부(軍事情報部)와 접촉하여 미주 한인의 대일전 참전문제를 협의하기 바란다는 서재필의 서신을 받고 미국측과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對日參戰)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1942년과 43년에 걸쳐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전쟁을 적극 후원하는 등 35년 동안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다가 광복을 목전에 둔 1945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