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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조령기슭 여기 이곳에 여류 아나키스트 카네코후미코(금자문자)여사가 고히 잠들어있다. 여사는 1904년 1월 25일 일본 야마나시현에 본적을 두고 횡빈시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속에 자라난 여사는 한때 고모 유인으로 한국땅 부강에서 방랑하였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철한 두뇌의 여사는 당시 일본제국의 포학한 략하에서 도탄에 빠져있는 한국인의 처참한 모습을 남달리 민감하였다. 고모의 학대에 못이겨 일본으로 되돌아가때는 벌써 여사의 가슴속깊이 자기의 모국 일본의 부정불의에 대한 의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여사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 항쟁하든 혁명투사 박렬선생과 생사를 같이할 동지일뿐만아니라 부부로 결합하였다는 필연의 결과다. 흑도회 흑우회의 맹원으로 활약하든 박렬선생은 여사와 같이 일본제국주의 상징인 천황을 모살할 계획을 세워 비밀리에 공작을 펴오든중 1922년 4월에 김중한 신산초대 유홍균 장상중 한광? ?동성 사성경 정태술 하세명 홍진유 최규종 율원일남 소천무 야구품이들 제씨와 더불어 혁명결사 불령혈을 조직하고 현사회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동경대지진 당시에 불령사 맹원 전원이 검거투옥되었다. 이렇게 검거되어 예심을 받던 과정에서 육홍균씨외 13명은 석방되고 박렬선생과 여사는 4년이라는 기 세월에 17회의 예심을 거쳐 1926년 2월 26일에 제1회재판개정을 도게되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추호의 동요없이 천황유해론 약소민족해방 한국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여일하게 주장하셨다. 급기야 그들은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치고 박렬선은 재판장에게 수고했군 하며 조소를 지었다. 이 사상의 일관성 이 태도의 침착성 이 생사의 초월성은 만세 되어서 사상가의 귀감이 아닐수 없다. 동년 7월 23일 여사는 수감중이던 도지기형무소에서 의문의 횡사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23세다. 동년동월에 여사의 유해는 그 무서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많은 동지와 시숙 박정식씨들의 정성으로 ?국에 반장되었으나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로 성분조차 제대로 하지못한채 50성상을 거치는동안 풍마우세로 그 근적도 찾기어렵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