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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동우회 의혈단 의거단 흑도회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더. 더욱 이 조선인학대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항의투쟁및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국제적 연대도 병행하면서 상해임시정부과도 긴밀한 연락을 지속하였다. 박의사는 또한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회원들을 규합하여 흑우회와 부정사를 조직 강도높은 학렬투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침략의 원흉이자 최고 수뇌인 일왕을 폭살하기 위하여 폭탄구입을 추진하던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민족적 통한이었다. 일제는 대재앙에 편승한 불온선인들이 비밀결사와 고관암살을 기도했다는 구실을 붙여 조선인 대검거를 단행하여 6600여명을 학살하고 주모자 박의사와 부인 금자문자여사를 체포한것이다. 금자문자여사는 박의사의 평생동지이자 반려자다. 일본여인이지만 조선인 유학생과 사상적으로 교류하면서 민족을 초월하여 박의사를 연모했고 함께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두사람은 1923년 10월 23일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두사람이 재판에 임했던 태도는 의연하고 당당하였으니 재판전에 네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기를 나는 조선민족의 대표이니 천황의 대표인 재판장과 동격이기에 조선의 예복을 입게할것, 좌석은 재판장과 동등하게 할것, 재판전에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탄핵하는 선언문을 읽게할것, 법정용어는 조선말을 사용하게 할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일부는 허용되는등 두사람의 옥중투쟁은 일본 조야를 뒤흔들었고 민족정기를 드높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금자문자여사는 도찌기형무소에서 교살당하여 향년 23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고 유언에 따라 박의사의 형 정식씨가 유골을 인수하여 문경읍 팔령산애 안장하였다. 박의사는 일제가 집요하게 황국신민화의 전향시도를 했으나 궆히지 않았고 유례가 드물게 23년동안 아키다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일제패망후 10월 27일에야 동포의 열열한 환영속에 석방되었다. 동경에 돌아와서는 신조선 건설동맹 위원장을 맡았고 김구선생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유해를 모국으로 봉환하였다. 이어서 박의사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고 범우파단체를 통한 재일거류민단을 발족시켜 초대단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금자문자여사의 묘소를 참배하였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 영구귀국하여